역사
조선의 마지막 왕실
오씨오
2006. 7. 25. 12:12
<적통 끊긴 비운의 조선 왕실> |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李玖.전주이 씨 대동종약원
명예총재) 씨가 지난 16일 일본의 한 호텔에서 별세함으로써 조선 왕실의 마지막 적통이 끊겼다.
조선왕조를 이은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가짐으로써 성립됐으나 일제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한일합병조약이 1910년 8월 29일 공포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제의 강점으로 대한제국은 사라졌지만 이왕가(李王家)는 그 뒤로도 존속해 영친왕이 순종을 계승했고 영친왕의 아들인 이구 씨는 황세손으로
불리었다. 파란만장한 이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마지막 적통 이구 씨의 타계로 전주 이씨 왕실의 가계도에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선 제 26대 왕인 고종(高宗)(1852-1919)는
모두 9남 4녀를 두었다. 하지만 이중에서 성인이 돼 결혼까지 한 아들은 명성황후 민씨 사이에서 낳은 2남 순종(純宗)
척(拓·1874-1926), 귀인 장씨 사이에서 낳은 6남 의친왕(義親王) 강(堈·1877-1955), 계비인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서 낳은
7남 영친왕(英親王) 은(垠·1897-1970) 등 세 명뿐이다. 순종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영친왕은 형 순종이 즉위한 1907년
황태자가 됐다. 이복 형 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자가 된 것은 그의 모친 순헌황귀비가 명성황후 사후 비 중에서 최고 서열이었기 때문이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한 뒤 영친왕은 '이왕(李王)'이라고 불리었다. 고종의 손자인 이구 씨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로 첫째 아들
진(晋)이 생후 8개월 만에 비명횡사해 사실상 마지막 황세손이 됐다.
마지막 황세손이라고 하지만 이름만 남은 왕실의 후손으로서
이구 씨의 인생은 좌절과 실의로 가득찼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건축과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건축일을 하기 위해 63년 귀국했으나 77년
운영하던 사업이 부도가 나자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다. 결혼생활도 순탄치 못해 58년 독일계 미국인의 딸 줄리아 씨와 결혼했으나 종친들의 종용으로
이혼했으며 슬하에 자녀도 없다. 어머니 이방자 여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일본의 피가 반쯤 섞였다는 시선도 그를 괴롭혔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조선
왕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궁궐을 비롯한 옛 왕실 재산은 모두 국가 소유가 됐다. 고인은 일본 도쿄에 거주하다가 96년 11월 다시 귀국,
기자회견을 통해 "내 귀국은 아버지 영친왕이 1907년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 뒤 90년 간 지속돼온 한.일간 통한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의친왕은 모두 13남 9녀를 둔 것으로 알려졌는데
미국에 살고 있는 9남 충길(忠吉) 씨가 생존자 중 가장 연장자로 '우리황실사랑회'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비둘기집'으로 유명한 가수
이석(李錫) 씨는 의친왕의 11남이다.
20일 오후 비행기편으로 고인의 시신이 도착하면 창덕궁
낙선재에 장례 빈청(殯廳=빈소)이 마련된다. 낙선재는 고인의 어머니인 이방자 여사가 사망했을 당시 빈청이 차려졌던 곳이다. 장례는 9일장으로
24일 오전 10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영결식을 갖는다. 이어 창경궁 정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앞- 종로 3가- 종묘앞- 동대문에서
반차행렬(운구행렬)을 갖고 11시 30분 종묘앞에서 노제를 치른 뒤 오후 2시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 뒤편 영친왕 묘역(영원 구역)에 안장된다.
일반인들도 빈청이 설치되는대로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조문할 수 있다. |